BMW의 역사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되었다. 뮌헨의 오베르비젠펠트 공항 근처에 자리하고 있던 구스타프 오토의 바이에른 항공기 공업(Bayerische Flugzeug-Werke, 약칭 BFW, 1916년 설립)과 카를 라프의 라프 엔진 공업사 (Rapp Motorenwerke, 1913년 설립)는 서로 수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1917년 BFW 공장은 하루에 약 200여대의 항공기를 생산 중이었는데, 공장이 큰 화재로 불타버려 가구나 생산하게 되버렸고 라프 엔진 공업사는 몇번의 사업실패를 겪고 있었지만 1917년 1월에 막스 프리츠가 합류했다. 막스 프리츠는 아주 중요한 인물인데, BMW 모토라드의 아버지와도 같다. 또한 성공적이었던 메르세데스-벤츠의 1914년 레이스카의 디자인에도 관여했던 인물이다. 이후 프리츠는 BMW의 첫 오토바이인 R32의 발매 후 BMW AG의 이사가 되었으며, 1925년부터 1937년까지 수석 디자이너도 맡았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뮌헨 공장을 책임지다 아이제나흐 공장으로 넘어가 1944년까지 근무했으며 1945년 은퇴하였다. 1966년 타계.
프리츠는 라프가 설계한 골칫덩어리 직렬 6기통 엔진을 손봤다. 덕분에 큰 계약을 따는데 성공했고, BFW보다는 그나마 좋은 상황이었다. BMW Type IIIa 엔진은 BMW가 처음으로 계약을 따내 제작한 물건이다. 막스 프리츠의 카뷰레터 설계 덕에 고고도 성능이 매우 뛰어났고 라프가 만들었던 오리지널 엔진의 진동 문제 역시 해결되었다.
막스 프리츠가 베를린 당국을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1917년 말 성공적으로 테스트를 거쳐 독일 제국 군부로부터 2000대의 계약을 받게 되었다. 생산된 엔진은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군의 전투기에 탑재되며 이 엔진이 탑재된 포커D VII를 조종했던 에른스트 우뎃이 공중전에서 30번의 승리를 달성하는 등 연합군 항공기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을 보여줬지만, 그 등장이 너무나 늦었기에 큰 인상을 남기긴 어려웠다.
1917년 7월 25일 카를 라프가 건강악화로 사임하고 프란츠 요세프 포프가 회장자리를 채우면서 회사의 이름을 바이에른 원동기 공업사 (Bayerische Motoren Werke), 줄여서 BMW로 바꾸게 된다. BMW라는 이름은 이때 시작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주가 지나자 모든 비행기용 엔진의 생산이 중단되어 버렸지만 포프는 1919년 2월에 공장을 다시 가동해 BMW IIIa 엔진의 개량형인 BMW IV 엔진의 추가 개발을 시작했다. 프란츠 제노 디머가 이 엔진을 사용해 고도 9760 m에 도달하는 세계 기록을 세웠지만 독일은 패전국이었고 FAI (국제항공연맹)는 이를 등재하지 않았다. 6월 28일 디머의 비행 이후 11일 만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1920년 중반까지 항공기 및 엔진 생산이 금지되었다.
때문에 BMW는 기차용 공압 브레이크 정도나 겨우 계약을 따내면서 만들게 되었다. 한편 BFW는 오토바이 제작을 시작했는데 BFW의 첫 오토바이는 1920년에 출시한 한프란트 (Hanfland)제 143 cc 2행정 엔진을 탑재한 Flink라는 오토바이였다. 이 오토바이는 오토바이라기보다는 엔진 달린 자전거에 가까웠다.
재밌게도 같은 시기에 BMW 역시 오토바이 제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공장감독관이자 1914년 빈-뮌헨 레이스에 참가해 3위를 차지한 이력이 있던 마틴 스톨이 포프에게 오토바이 엔진개발을 설득한 것이 시작이었다. 마틴 스톨은 이 더글러스 500 cc가 레이스에서 보여준 신뢰성에 감탄했었고 포프에게 유사한 엔진 생산의 승인을 설득했다고 한다.
허가가 떨어지자 마틴 스톨은 자신의 1914년식 수평대향 2기통 더글러스 500 cc 오토바이를 가져와 해체했고 복제품 제작에 불만이 많았던 막스 프리츠는 마지못해 부품들을 측정해 카피한 엔진에 나름의 개량을 가했는데, 이렇게 BMW M2B15 엔진이 탄생했다. 2는 2기통, B는 박서를 의미하며 형태 자체는 더글러스의 실린더를 앞뒤로 배치한 형태와 똑같았다.
이 오토바이용 엔진은 이후 여러 회사의 오토바이에 탑재되었다. 마틴 스톨이 뉘른베르크의 빅토리아 바이크를 찾아가 이 엔진을 빅토리아 바이크에 실어달라고 설득해 탄생한 빅토리아 KR1이 유명하다. 이 엔진이 탑재된 오토바이 중엔 파산위기에 빠진 BFW가 빅토리아와 경쟁하기위해 1921년 말에 판매했던 Helios도 있었다. 마틴 스톨은 정작 1922년에 회사를 떠났는데 BMW가 여행경비로 100 마르크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후에 빅토리아에서 KR2라는 오버헤드밸브를 장착한, 당시 독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스포츠 오토바이를 제작했는데 BMW의 R32를 포함한 그 어떤 오토바이보다도 우월한 성능을 보여줬었다.
BMW, BFW 이 두 회사는 1922년 6월에 합병되었다. BMW는 BFW를 합병하면서 BFW 부지로 옮겨가 BFW의 Helios 오토바이 생산라인과 재고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빅토리아에서 BMW의 M2B15 엔진을 더 이상 납품받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때 오토바이의 생산라인이 BMW로 넘어오고, 당시 회장인 포프에게 오토바이 제작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오토바이 제작의 미래를 본 포프는 막스 프리츠에게 완전한 형태의 오토바이 설계를 지시했다. 막스 프리츠는 뒤쪽에 위치한 실린더의 보다 효과적인 냉각을 위해 기존 BMW M2B15 엔진의 앞뒤 실린더 배치를 좌우 배치로 변경했다. 또한 신뢰성과 유지보수를 위해 밸브타이밍 기구들을 안쪽으로 전부 밀폐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고 파이널 드라이브에 샤프트를 구성했다. 놀라운 것은 샤프트의 관절부를 없애버리기 위해 프레임을 통짜로 구성하고 고무 디스크를 사용해 충격을 흡수했다.
이런 구성은 막스 프리츠의 디자인이 최초였고 이후 제작되는 BMW의 모든 수평대향 엔진 탑재 오토바이는 이 좌우 배치형 수평대향 2기통과 샤프트 구동이라는 틀에서 제작된다. 당시 생산했던 R32는 프리미엄 오토바이었고 가격도 비쌌다. 그렇다고 엔진의 출력이나 브레이크 계통이 다른 회사의 바이크보다 훌륭하거나 혁신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R32가 잘 나갔던 이유는 시대를 앞서간 품질과 신뢰성, 획기적인 유저 친화적 설계와 편한 정비성이 다른 500 cc 오토바이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후에 오버헤드밸브를 적용한 프로토타입 R32가 1924년 ADAC 동계 랠리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이는 BMW의 첫번째 모터스포츠 대회 우승 기록이다.
이 프리츠의 좌우배치형 수평대향 엔진 설계는 1922년 12월에 도면이 그려졌는데, 좀 더 이른 시기인 1919년 영국의 솝위드 ABC 모터사이클에도 같은 형태의 좌우 배치형 엔진이 탑재되어 있었다. 솝위드 ABC는 BMW가 자신들의 오토바이를 그대로 카피했다고 비난했지만 솝위드 ABC의 오토바이는 파이널 드라이브가 샤프트가 체인구동방식이었고 카뷰레터 등의 핵심 설계에서 프리츠의 박서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입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당시 막스 프리츠는 솝위드 ABC제 오토바이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1923년 9월에 베를린에서 BMW의 첫 오토바이인 R32가 팔리게 되면서 BMW는 오토바이 제작회사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BMW는 1928년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아이제나흐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 뒤, 원래 생산되고 있던 영국제 오스틴7의 라이선스 생산 차량인 딕시(Dixi) 3/15를 BMW 3/15로 고쳐 4륜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보다시피, BMW는 혼다처럼 자동차보다 오토바이를 먼저 생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BMW는 나치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켜 자사의 오토바이와 군용기 엔진 등 군수품을 생산해 납품한 전범기업이었다. 이 당시 납품했던 엔진 중 대표적인 것은 포케-불프 Fw190의 엔진인 BMW 801. 이 외에도 메서슈미트 Me 262 슈발베의 엔진을 납품하는 등 여러 물자들을 납품했다. BMW는 한동안 다른 독일 전범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강제 노역에 대해 전쟁의 불행한 결과이며 나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다가 1998년 미국에서 집단 소송과 불매 운동 위기에 처하자 2000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기억, 책임과 미래 재단(Stiftung 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이라는 강제 노역 피해자 배상 재단을 설치해 이곳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피해 보상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BMW의 공장이 연합군의 폭격을 맞아 싸그리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는 연합국이 전범기업으로 지정해 3년 동안 생산 금지 명령을 받아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다. 또한 503을 비롯한 새로운 고급차 라인은 독일 실정과 맞지 않아서 부진한 실적을 남겼다. 때문에 매우 어려운 시기를 지나야 했는데, 이 어려운 와중에 발매한 오토바이인 R24의 대성공으로 BMW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전 모델인 R23의 설계도마저 불타버려 남은 모델을 뜯어 설계도를 다시 그려 개량했다고. 생산공장 규모나 자재 공급도 매우 열악하여, 오펠 사의 철판을 빌려써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륜차가 없었으면 오늘날 살아남지 못했을 정도로 BMW와 이륜차 사이의 역사가 깊다. 1959년 BMW의 이사회는 BMW를 다임러에 매각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주들이었던 크반트 가문의 이복 형제인 헤르베르트 크반트와 하롤트 크반트가 BMW 지분의 50% 이상이 될 정도로 자금 수혈을 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러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해 오늘날의 BMW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BMW 이세타와 노이에 클라세 시리즈가 투입되면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의 경제 악화로 인한 자동차 회사 파이어 세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1994년 1월에 BAe(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 현 BAE 시스템즈)로부터 로버 그룹을 인수했다. 여기엔 로버와 랜드로버, 미니 등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뉴 레인지로버 초기형에는 BMW X5와 동일한 V8 4.4L 가솔린 엔진이 올라갔다. X5의 클램 셸 테일게이트도 레인지로버에서 따온 것이다. 1998년에는 폭스바겐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롤스로이스를 인수했다.
롤스로이스 인수 과정은 좀 특이한데, 원래 BMW가 거의 인수했던 것을 폭스바겐이 중간에 가로챘다. 하지만 롤스로이스 상표권은 롤스로이스 항공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BMW는 롤스로이스의 상표권만을 따로 인수한다. 즉 크루 공장을 포함한 회사는 폭스바겐이 인수했으나 브랜드는 BMW가 인수한 꼴이 된 것. 하지만 폭스바겐의 목적은 롤스로이스의 공장과 롤스로이스의 자회사인 벤틀리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결국 둘이 이해관계가 맞아서 롤스로이스는 BMW로, 벤틀리는 폭스바겐으로 가게 되었다. 기존 공장이 폭스바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BMW는 영국 굿우드에 새로운 롤스로이스 공장을 지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자에 2000년 랜드로버를 포드에 매각하고, MG와 로버는 피닉스 컨소시엄에 매각하였다. 특히 로버의 경우 적자 폭이 너무 커 단돈 1파운드에 매각했다. 이후 로버는 2005년 파산하고 중국의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갔다. 후에 MG 역시 상하이자동차로 팔린다.
특이하게도 미니는 팔지 않고 독자 브랜드로 계속 생산 중이다. 더불어 롤스로이스는 인수 후 매년 고성장을 거듭하며 2003년 300대에 불과하던 판매량이 2018년엔 4,100대를 넘어선 상태다.
독일 외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르탄버그,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슬린에 현지공장이 있다. 로슬린 공장은 BMW 최초의 외국 현지공장으로 1973년부터 가동 중이며, 한때 후기형 E90의 남아공 로슬린 현지공장 생산분이 대한민국에 수입된 적이 있었다. 스파르탄버그 공장은 SUV 생산라인이며, X5의 출시를 위해 신설했다. 멕시코에도 현지공장을 신설할 예정.
최근에는 자신들의 차량을 바탕으로 고성능 컴플릿 모델을 제작하던 협력업체 알피나를 인수한다. 2022년 3월 10일(현지 시간) BMW 그룹이 알피나를 BMW 그룹 내에 편입시킨다는 공표를 하였으며, 알피나는 M과 같이 BMW 그룹 내 독립된 브랜드가 되어 비스포크+그랜드 투어링 라인업으로 재편된다. 인수 이후에도 알피나의 기존 제품군에 대한 애프터서비스와 튜닝 파츠 판매는 지속할 것이라고 한다.
브랜드 역사
BMW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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